
개요
페르소나 5의 엔딩을 보기까지 약 2년이 걸렸습니다. 이는 플레이타임 자체가 길어서라기보다는, 게임을 진행하다 흥미를 잃고 중단하기를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총 네 차례에 걸쳐 게임을 다시 시작했으며, 매번 서로 다른 목적과 기대를 가지고 플레이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인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성에 따라 '페르소나 5'를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정리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작품이 ‘기대치 불일치’라는 관점에서 어떤 시사점을 제공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시도: 명작으로 평가받는 게임인 만큼 아무런 정보 없이 플레이


어떠한 스포일러나 사전 정보도 확인하지 않은 채, 단지 ‘명작’이라는 평가만을 듣고 게임을 구매해 플레이를 시작했습니다. 애니메이션 연출은 훌륭했고, UI 아트 또한 인상적이어서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인게임 3D 그래픽이 상당히 조악하게 느껴졌고, 이로 인해 초반부터 거부감이 조금씩 쌓였습니다. 그래픽에 크게 집착하는 편은 아니기에 일단 게임을 계속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게임을 접게 됩니다. 날짜 시스템, 주인공의 능력치(지성, 매력 등), 관계 시스템, 페르소나, 귀중품, 잠입 도구, 전투 보조 아이템, 선물용 아이템 등 관리해야 할 요소 및 정보량이 너무 많았고, 세상 못생긴 셰도 디자인, 우중충한 팰리스 분위기, 불쾌한 캐릭터 얼굴과 팰리스 컨셉, 게임 도중 반복적으로 취조실이나 꿈속 세계로 끌려가는 연출, 새로운 지역이 해금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정보량 등 게임을 접고 싶게 만드는 요소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첫 번째 팰리스를 클리어했지만, 두 번째 팰리스가 시작되려는 시점에서 “이 과정을 또 반복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게임을 중단했습니다.
두 번째 시도: 애니메이션을 보듯이 플레이해보며 스토리에 집중해보자

간간히 나오는 애니메이션의 퀄리티와 게임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며, 이 게임은 게임성보다는 스토리텔링의 비중이 큰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게임성은 잠시 내려놓고, 스토리에 집중해 보자는 목적을 가지고 다시 플레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집중하고 캐릭터의 매력을 쫓았지만, 아쉽게도 제 취향에 맞는 캐릭터는 없었습니다. 아무 말 없는 주인공, 하루 종일 소리 지르는 노란 머리 남자애, 어딘가 애매하게 외국인 느낌이 섞인 여자애, 분위기는 잡지만 노잼인 파란 머리 남자애, 별로 안 귀여운 고양이 등, 캐릭터의 매력으로 저를 설득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이는 게임 자체의 문제라기 보단 우연히 그 중에 취향이 없었던 것에 가깝기에 그냥 아쉬울 뿐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시점부터 전투 시스템에는 조금씩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상성을 활용해 상태 이상을 유도하고 총공격을 발동시키는 턴제 특유의 전략 요소가 점차 체감되었고, 전투 시스템이 생각보다 얕지는 않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재미를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두 번째 팰리스를 클리어한 직후의 느낌은 뭔가 아쉬웠습니다. 딱봐도 악역으로 보이는 화가 아저씨가 피해자로 보이는 파란 머리를 괴롭혀왔고, 괴도단이 출동해서 참교육하겠구나 싶었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심지어 팰리스에서 보물을 훔쳐 개심시킨다는 핵심 구조는 첫 번째 팰리스와 완전히 동일했습니다. 결국 스토리 게임으로서 정성 들여 만들긴 했지만, 스토리 자체가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다는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세 번째 시도: 캐릭터의 매력이 플레이 동기로 전환

시스템도 어느 정도 파악했고, 기대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그래도 이미 샀으니 조금 더 해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플레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세 번째 시도에서는 비교적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팰리스에서 중심적으로 다루는 캐릭터 '마코토'의 스토리가 제게 어느 정도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그 점이 인상 깊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게임성이 특출나게 좋아졌다기보단 우연히 플레이어인 제가 해당 캐릭터의 서사에 공감할 수 있었기에 서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마무리되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 그것이 세 번째 팰리스를 깨게 하는 동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재밌었기에 네 번째 팰리스까지도 이어서 플레이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네 번째 팰리스 역시 비교적 즐겁게 클리어했습니다. 이번에도 핵심 요인은 캐릭터의 매력이었지만, 이번에는 스토리에 대한 공감보다는 캐릭터 자체의 매력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네 번째 팰리스의 주요 캐릭터이자 빌런으로 등장하는 ‘후타바’는, 주요 인물과 빌런이라는 두 역할을 동시에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개발사가 얼마나 이 캐릭터를 중요하게 다루는지 분명히 느껴졌고, 실제로 그 정도로 이 캐릭터는 설정, 외형, 행동 전반 등이 이 게임을 플레이할 사람들이 좋아하기 쉽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캐릭터 ‘후타바’는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천재 해커이자, 사회성이 부족하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능력을 보이고, 4차원 성격에 게임을 좋아한다는 설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페르소나 5’라는 100시간짜리 패키지 게임을 수 만원을 주고 플레이할 방구석 플레이어들에게 유사성 매력효과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개발사가 팰리스 하나를 통째로 할애해서 밀어주는 캐릭터인 만큼 외형이나 보이스도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신경을 쓴 듯 하고요.
플레이어가 인게임 캐릭터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받아들이게 되면 해당 캐릭터 관련 컨텐츠에 대한 욕심이 생기게 되면서 게임을 지속적으로 플레이할 동기가 생기게 됩니다. 저 또한 방구석 게이머로써 게임사의 전략이 아주 잘 통해버렸기에 그렇게 네 번째 팰리스를 클리어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게임성에 큰 변화는 없었고, 오로지 매력적인 캐릭터 및 스토리를 제시하고 그 스토리의 뒷부분이, 그리고 이 캐릭터의 다른 이벤트들이 궁금하지 않냐는 식으로 제가 게임을 계속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팰리스 이후에는 다시 게임에 대한 동기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네 번째 팰리스까지 쭉 달려 체력적으로 지친 상태에서, 매력적으로 느꼈던 '후타바' 캐릭터의 팰리스 서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듯 한 와중에, 의도치 않게 외국 살다 온 여자애 캐릭터와 연인 관계가 확정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연애 시뮬레이터처럼 게임을 즐길 생각이 없었고, 설령 연애 시뮬레이터처럼 게임을 즐길 생각이 들어도 굳이 그 외국 살다 온 여자애의 추가 이벤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라는 충격적인 텍스트가 재생되었고, 그렇게 저는 동기가 사그라든 상태에서 게임의 흐름 마저 미연시라는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방향으로 빠져버려 게임을 접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시도: 스토리텔링 게임이 아닌 미연시로서의 '페르소나 5'



일단 돈 주고 샀고, 명작으로 불리우기에 끝까지 깨보자는 생각에 다시 '페르소나 5'를 집어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대놓고 미연시를 플레이하는 것처럼 플레이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이 게임에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터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은 구매 전부터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방향으로 즐기지 않았던 이유는, 이 게임이 높은 평가를 받는 데에는 그 이상의 게임적 가치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선 시도들에서 모두 흥미를 잃고 유기를 해버렸고 마지막엔 미연시로써의 편린을 발견했기에, 네 번째 시도에 이르러서는 이 게임을 미연시로써 즐겨야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접근 방식은 옳았습니다. 이번엔 팰리스를 깨고 스토리 진행 및 엔딩을 향해 가는 것에는 힘을 빼고, 미연시답게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고르고 그 캐릭터의 스토리 라인 및 이벤트를 파헤치는 것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랬더니 이전에는 의미 없거나 단순 노동처럼 느껴졌던 수많은 시스템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고, 노력 → 성취의 구조가 명확해지면서 게임적 재미와 성장의 재미 또한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 팰리스 공략과 큰 상관 없는 캐릭터 이벤트에 그렇게까지 공을 들인 이유: 애초에 게임의 주요 목적이 팰리스 깨고 스토리 진행보다 마음에 드는 캐릭터 호감도 올려서 이벤트 보기니까
- 캐릭터와의 관계 레벨에 전투 보너스를 부여한 이유: 미연시에 집중해도 전투에 유의미하게 작용되어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려고
- UI가 스마트폰 형태인 이유: 친구/연인과 연락하는 느낌 강조
- 필요 없어 보였던 코스튬 보상의 존재 이유: 마음에 드는 캐릭터한테 마음에 드는 옷 입혀서 캐릭터에 대한 애정 높이라고
- 지성, 매력 등 주인공 능력치의 의미: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꼬시기 위해 올려야 하는 능력치
- 아르바이트나 영화 관람과 같은 시간 소비 콘텐츠의 필요성: 그 능력치를 올리기 위해 필요한 노가다 필러 컨텐츠
- 지역이 쓸데없이 많은 이유: 지역이 해금될 때마다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데려가서 새로운 이벤트를 볼 수 있음 → 게임 진행에 대한 보상으로 작용
- 선물용 아이템이 쓸데없이 많은 이유: 마음에 드는 캐릭터의 취향을 파악한 뒤 좋아할만한 선물을 주면 그 캐릭터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호감도를 크게 올릴 수 있음
- 똑같은 이벤트를 진행함에도 굳이 대화 선택지에 따라 호감도 점수 차등을 둔 이유: 캐릭터를 꼬시고 싶다는 동기를 기반으로 캐릭터의 성향을 파악하여 어떤 대화 선택지가 유의미하게 작용할지 선택, 이후 그 선택에 따라 호감도가 크게 오르는 뚜렷한 동기→ 노력 → 결과→ 보상 구조
결론 및 여담
이러한 사례는 게임 기획 관점에서 '기대치 불일치'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하나의 게임이 여러 방향성으로 소비될 수 있도록 설계되는 것은 분명 장점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각 방향성에 대한 기대치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할 경우 플레이어 경험의 편차를 크게 만들 위험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페르소나 5는 턴제 전투, 스토리텔링, 캐릭터 관계 시스템 등 다양한 축의 시스템을 모두 높은 밀도로 제공하고 있지만, 이들이 어떤 경험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는지, 그리고 가장 공들인 부분은 어딘지에 대한 안내는 비교적 모호한 편입니다.
그 결과 플레이어는 자신이 기대한 방향성과 실제 게임이 가장 강하게 밀어주는 방향성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게 될 수 있으며, 이 괴리는 곧 “명작이라고 들었는데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라는 평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시 말해, 게임 자체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플레이어가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체감 재미가 극단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구조인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페르소나 5는 ‘잘 만든 게임’인 동시에, 방향성에 대한 합의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 얼마나 강한 호불호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향후 게임을 기획할 때, 시스템의 다양성만큼이나 “이 게임을 어떤 경험으로 받아들여주기를 원하는가”를 플레이어에게 얼마나 명확하게 전달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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